밥상을 차리다. 김종제 사월에 꽃들 무진장 피어나는 것은 한 겨울 폭설에 굶주려 허기진 세상에 따듯한 밥상을 차리는 것이다 한데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상처나고 지친 세상에 위로의 수저를 건네 주는 것이다 가족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는 노숙자인 저 들과 산에 손을 잡아 주고 옆에 같이 앉아 사월은 .. 詩 2013.05.05
가시연 가시연 조용비(1962- ) 태풍이 지나가고 가시연은 제 어미의 몸인 커다란 잎의 살을 뚫고 물속에서 솟아오른다 핵처럼 단단한 성게 같은 가시봉오리를 쩍 가르고 흑자줏빛 혓바닥을 천천히 내민다 저 끔찍한 식물성을,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꽃인 듯한 가시연의 가시를 다 뽑아버.. 詩 2012.12.24
환합니다 환합니다 정현종( 1939-) 환합니다 감나무에 감이, 바알간 불꽃이, 수도 없이 불을 켜 천지가 환합니다, 이 햇빛 저 햇빛 다 합해도 저렇게 환하겠습니까, 서리가 내리고 겨울이 와도 따지 않고 놔둡니다 풍부합니다 천지가 배부릅니다. 까치도 까마귀도 배부릅니다. 내 마음도 저기 감나무.. 詩 2012.12.14
슬픈 공복 정진규(1939- ) 거기 늘 있던 강물들이 비로소 흐르는게 보인다 흐르니까 아득하다 춥다 오한이 든다 나보다 앞서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를 하는 슬픈 내 역마살이 오슬오슬 소름으로 돋는다 찬 바람에 서걱이는 옥수숫대들, 휑하니 뚫린 밭고랑이 보이고 호미 한 자루 고꾸라져 있다 누가 .. 詩 2012.11.27
말벌을 기리는 노래 말벌을 기리는 노래 김진경(1953- ) 쑥부쟁이며 산국도 시들해진 늦가을 한낮 갈 곳 없는 벌들이 떨어져 한 귀퉁이가 깨어진 배의 단내에 취해 닝닝거리더니 서리 내린 아침 한 귀퉁이가 깨어진 배 얼어붙어 있고 그 위에 말벌들이 배의 단물을 빨던 모습 그대로 여러 마리 죽어 있다. 마지.. 詩 2012.11.06
언제인가 어느 곳이나 언제인가 어느 곳이나 하 재 연(1975ㅡ ) 바람이 지나가고 벚꽃잎이 떨어진다 이 기차는 나를 어디엔가는 데려다줄 것이다 떨어진 벚꽃 위로 떨어지는 벚꽃의 얼굴이 한순간 반짝인다 나는 올려다본다 스카 라스카 알라스카 단단하고 하얀 이름이 입속에서 조금씩 녹아내릴 때 내가 낼 수 .. 詩 2012.04.15
대숲 바람소리 대숲 바람소리 송수권(1940- )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믈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, 삿갓머리에 후.. 詩 2011.10.24
흔들릴 때마다 한 잔 흔들릴 때마다 한 잔 감 태 준 (1947- )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,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, 흔들릴 때마다 한 잔씩,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, 소주에서 소주 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,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.. 詩 2011.10.13
시월 시월 이문재 (1959- )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, 툭,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.. 詩 2011.10.12