해거리
하종오(1954- )
원래 남의 밭에 있던 것을 슬쩍 해와서
화단에 심어놓은 뒤로 내 속셈 모르는 척
적작약이 다신 꽃을 피우지 않았답니다.
제까짓 놈 제까짓놈 언제까지 영 꽃 안 피우는지
두고보자 벼른 지 몇 해 되는 사이에 그만
나는 눈길을 거두었고, 되는 일이 없었답니다.
날 사로잡아봐야 흰 꽃송이나 도둑당하지 싶어서
에잇 고얀 사람 에잇 고얀 사람 지 맘대로 하라는 건지
적작약이 잎사귀만 내어 보이고 일찌감치 시들었답니다.
서로 본체만체 하는 동안에 비로소 알았을까요.
오래 내 눈빛을 받아야 저도 꽃만울을 맺고
제 꽃봉오릴 오래 보여주면 나도 잘 된다는 걸.
올해는 희디흰 꽃송이를 송이송이 벙글었답니다.
아니, 아니, 한해 더 넘기면 꽃을 피워서는 안될 일이
적작약에게 있었을 겁니다.